데이비드 호크니 현대미술의 거장 이야기 4 데이비드 호크니가 그려낸 관계의 심리
특유의 선명한 색채와 캘리포니아의 눈부신 햇살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데이비드 호크니.
그의 작품들은 겉보기엔 한없이 평온해 보이지만, 인물들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과 심리적 거리를 묘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그의 수많은 명작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지고 흥미로운 뒷이야기를 품고 있는 두 작품,
<클라크 부부와 퍼시>와 <예술가의 초상 (두 사람이 있는 수영장)>을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신혼집, <클라크 부부와 퍼시 (Mr and Mrs Clark and Percy)> (1970~1971)

이 작품은 호크니의 절친한 친구이자 1960~70년대 런던 패션계를 주름잡았던 패션 디자이너 오시 클라크(Ossie Clark)와
그의 아내인 텍스타일 디자이너 실리아 버트웰(Celia Birtwell) 부부의 신혼집 풍경을 담은 실물 크기의 초상화입니다.
런던 노팅힐에 위치한 그들의 세련된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이 그림은 겉보기엔 평화롭고 트렌디한 부부의 일상 같지만,
캔버스 곳곳에는 미묘한 긴장감과 상징들이 치밀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두 사람의 구도와 자세입니다. 서양 미술의 전통적인 부부 초상화에서는 남성이 당당하게 서 있고 여성이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부부의 역할이 뒤바뀌어 있습니다.
아내인 실리아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서서 관람객을 정면으로 똑바로 응시하는 반면,
남편인 오시는 신발을 벗은 맨발로 의자에 푹 파묻혀 비스듬히 앉아 시선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부 관계의 주도권이 실리아에게 있거나, 좁혀지지 않는 두 사람의 독립적이고 분리된 성향을 암시합니다.
또한, 오시의 무릎 위에 꼿꼿하게 앉아 있는 하얀 고양이를 주목해야 합니다. 작품의 제목은 '퍼시(Percy)'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사실 그림의 모델이 된 이들의 반려묘 진짜 이름은 '블랜치(Blanche)'였습니다.
호크니는 단지 '퍼시'라는 이름이 제목으로 쓰기에 리듬감이 더 좋다고 생각하여 임의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미술사에서 고양이는 종종 '시기'나 '불륜'을 상징하는데, 얀 반 에이크의 명작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 등장하는 '충성'의 상징인 강아지와 완벽하게 대비되는 장치입니다.
얄궂게도 이 부부는 오시 클라크의 양성애적 외도 등으로 인해 결혼 3년 만인 1974년에 파경을 맞이하게 되며
호크니의 이 그림은 마치 부부의 예정된 파국을 예견한 듯한 서늘함을 줍니다.
그림 중앙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의 백합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순결이나 임신(수태고지)을 상징하는데,
실제로 이 초상화를 그릴 당시 실리아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눈부신 수영장 속의 상실감, <예술가의 초상 (두 사람이 있는 수영장, Portrait of an Artist)> (1972)

호크니 하면 대중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시그니처 이미지는 단연 '수영장'일 것입니다.
1972년에 완성된 이 거대한 아크릴 캔버스 작품은
201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9,030만 달러(당시 환율로 약 1,019억 원)에 낙찰되며,
당시 생존 작가 중 최고 경매가 기록을 경신해 전 세계 미술계를 뒤흔들었습니다.
이 그림의 탄생 비화는 우연한 발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호크니의 스튜디오 바닥에 우연히 두 장의 사진이 나란히 겹쳐져 떨어져 있었는데,
한 장은 수영장 물속을 헤엄치는 사람의 왜곡된 이미지였고
다른 한 장은 무언가를 내려다보는 소년의 사진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맥락의 두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묘한 서사에 매료된 호크니는 즉시 붓을 들었습니다.
중간에 그림을 파기하는 슬럼프도 있었지만,
뉴욕 전시회를 불과 4주 앞두고 프랑스 생트로페의 한 별장으로 달려가 수백 장의 수영장 사진을 직접 찍으며 다시 구도를 잡았습니다. 이후 런던으로 돌아와 하루 18시간씩 2주 동안 쉬지 않고 몰두하여 완성해 낸 집념의 결정체입니다.
수영장 밖에서 핑크색 재킷을 입고 물끄러미 물속을 내려다보는 남성은 호크니의 옛 연인이자 가장 중요한 뮤즈였던 피터 슐레진저(Peter Schlesinger)입니다. 그리고 물속에서 평영을 하며 그를 향해 다가가는 인물이 정확히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피터의 새로운 연인이라는 설,
혹은 호크니 자신을 투영했다는 분석이 엇갈립니다.
눈부시게 맑은 캘리포니아의 햇살과 목가적인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낭만적인 풍경 속 두 사람 사이에는 물리적으로 절대 닿을 수 없는 깊은 심리적 거리감과 단절감이 흐릅니다.
'물'이라는 매질을 사이에 두고 시선만 교차하는 이 정적인 장면은,
끝을 향해가는 연인 관계에서 느껴지는 멜랑콜리함과 처연한 상실감을 극대화합니다.
호크니는 찰나에 부서지는 수면의 기하학적 물결 패턴과 투명한 물의 질감을 캔버스에 박제하듯 섬세하게 묘사해 냈으며,
단순한 풍경화를 넘어 인간관계의 복잡한 내면을 완벽하게 시각화한 명작으로 남았습니다.
마무리하며
데이비드 호크니의 두 작품은 겉보기에는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색채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지만,
캔버스 이면에는 인물들 간의 미묘한 심리와 관계의 권력 구조가 치밀하게 짜여 있습니다.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면,
화려한 색채 너머에 숨겨진 작가의 냉철한 시선과 인물들의 스토리를 함께 발견해 보시길 바랍니다.